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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며 어제는 하루 종일 책장을 정리했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손녀의 책이 들어설 공간을 비워 두고 싶었습니다.내 책을 조금씩 옆으로 밀어 놓고 작은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 이상하게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아이들의 책을 사 모으고, 책가방을 챙기며 하루를 보냈습니다.이제는 그 아이들의 아이를 위해 책장을 비워 두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세월은 참 빠릅니다.젊은 날에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잃어가는 일이 아니라, 내 자리를 조금씩 다음 세대에게 내어 줄 줄 아는마음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장 한 칸을 비우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더 채워졌습니다. 그 자리에 손녀의 그림.. 2026. 8. 7.
장을 나눈다는 것 해마다 장을 담근다. 1월에 장을 담궈 60일을 기다려 3월에 간장과 된장을 가른다. 하지만 된장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간장에게 내어준 맛을 다시 되찾기 위해 메주가루를 넣고, 고추씨가루를 더한다.푹 삶아 곱게 간 콩물과 되직하게 지은 찰밥을 섞는다.그리고 8년 동안 간수를 빼며 기다린 소금으로 마지막 간을 맞춘다. 장을 담그는 일은 늘 기다림이다. 시간은 손으로 만들 수 없기에 계절이 대신 일을 한다.완성된 된장을 작은 용기에 나누어 담아 베란다에 차곡차곡 올려놓는다.다시 숙성이라는 시간을 건네기 위해서다.이 작은 용기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오랜 친구들, 고마운 사람들, 내 삶을 함께 지나온 이들의밥상으로 하나둘 떠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정성을 들여 왜 나누느냐"라고 묻는다.하지만 이상하게도.. 2026. 8. 4.
여름날의 선물 어제는 주말이라 손녀가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잠깐이라도 학원에 가면 딸도 숨을 돌릴 시간이 생길 텐데, 요즘은 혼자 아이를 돌보느라 많이 지쳐 보인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면 좋겠다.' 그 마음 하나로 잠자리채를 챙겨 손녀와 집을 나섰다. 배낭에는 물 한 병, 휴지, 비닐 돗자리, 잠자리채 두 개, 그리고 과자 한 봉지. 제법 거창한 탐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서자마자 현실이 우리를 맞았다. 기온은 40도에 가까웠고, 뜨거운 햇살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에게 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된 벚나무에 붙은 매미를 발견하자 숲 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쫓아다녔다. 나는 몇 걸음 따라가다 이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손녀를 따라가는.. 2026. 8. 2.
올해 생일이 유난히 따뜻했던 이유 아침에 눈을 뜨니 딸이랑 손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생일 축하를 해준다. 혼자 보내는 생일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내 생일도 잊고 지냈는데, 딸이 차려준 아침상을 받는 순간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호텔 데판야끼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식사도 같이 했다. 생일이라는 날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꽉 채워줄 수도 있구나, 오랜만에 느꼈다. 그러다 문득 예전 생일 하나가 떠올랐다. 아이들이 귀띔으로 해서 마지못해 따라 나갔던 생일 외식. 집 앞에도 괜찮은 식당이 있었는데 굳이 여름이라며 영양탕집으로 갔다. 생일인 내가 뭘 먹고 싶은지는 선택할 여지도 주지 않는 사람. 더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식사 중이었다.전 배우자는 상간녀랑 통화하느라 자리를 비웠고,나는 혼자 식탁에 앉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 2026. 8. 2.
쿨한 이별을 할 수 있는 능력 어제 법원에서 강제집행을 앞두고 집행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담당자는 처음에는 흔히 있는 채권·채무 관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을 듣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오래 끌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일이라면, 집을 비워 달라는 문제라면, 대부분은 어느 순간 현실을 받아들인다.끝까지 버틴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헤어짐을 인정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미 끝난 관계인데도 미련과 오기, 자존심이 뒤엉켜 시간을 붙잡는다. 그 시간은 결국 서로를 더 지치게 만들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도 '이별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 사.. 2026. 7. 31.
손녀의 구구단 요즘 손녀는 구구단을 외우고 있다. 외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교육방식이 한국과는 제법 다르다. 암기보다는 개념을 이해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수업이라 장점도 많지만, 한국의 선행학습에 익숙한 내 눈에는 조금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다.손녀는 토요 한글학교에 다니고, 집에서도 거의 한국말을 사용해서인지 한글은 아주 잘한다.하지만 산수가 걱정되었는지 딸은 며칠 전 문방구에서 구구단표를 사 와 거실 벽에 붙여 놓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30여 년 전 초보 엄마였던 시절이 떠올랐다. 전후 세대였던 우리는 누가 시켜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내야 했다. 갱지로 된 노트에 직접 적어가며 외웠다. 접어서 들고 다니며 외우다 보면 접힌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져 있기도 했지.세월이 흘러 내 아이를 키울 때는 문방.. 2026.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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