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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국을 끓이며... 어릴 적, 친정어머니는 추석을 전후로 아욱국을 자주 끓여 주셨다. 뽀얀 쌀뜨물을 받아 다시멸치 한 줌과 무 꽁다리, 대파 뿌리를 넣고 푹 끓여 육수를 내셨다. 거기에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 한 술을 넣어 팔팔 끓이다가, 소쿠리에 넣고 박박 문질러 풋내와 거품을 뺀 아욱을 넣어 한소끔 더 끓이셨다. “고추장을 넣으면 국물이 텁텁해진다.” 그러시며 어머니는 꼭 고추장 대신 고춧가루를 넣으셨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아욱국은 구수하면서도 끝맛이 칼칼하고 개운했다. 뜨끈한 국 한 그릇씩을 받아 들고 후후 불어가며 먹었던 그 맛.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그 국물 맛을 기억한다. 몸이 편찮으실 때도 그랬다.며칠 앓다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시면 부엌으로 들어가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셨다. 그때는 그것.. 2026. 10. 6.
손녀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 아침부터 묵은 창문을 닦았다. 앞 베란다 창문과 뒷창문, 사위의 서재 창문에 뿌옇게 흐려져 있던 부엌 창문까지 떼어내 세제로 말끔하게 닦았다. 구축 아파트라 아무리 닦아도 새것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내 힘이 닿는 만큼 닦고 또 닦았다. 할 일을 해낸 탓일까. 몸은 분명 움직였는데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뿌옇던 유리가 맑아진 만큼 마음 한구석도 환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뤄두었던 어반스케치 숙제를 꺼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어반스케치. 이사하느라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고, 물감이며 파스텔이며 그림 재료들은 모두 하동집에 가져다 놓은 뒤였다. 그래도 그리고 싶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나니 색을 입힐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손녀의 크레파스와 사인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것.. 2026. 9. 28.
친구의 사랑으로 다시 배운 것들 지난 금요일 아침이었다. 전날에도 가까운 동네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고 돌아왔기에 하룻밤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지려니 했다. 그런데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세상이 핑 돌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어지러웠다. 문득 친구가 생각났다.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지만 병원장 부인이기도 한 친구였다. 급하게 전화를 걸어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친구의 대답은 단호했다. “당장 응급실로 들어와.” 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해보니 헤모글로빈 수치가 8 정도였다. 정상 범위에 한참 못 미치는 심한 빈혈이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해왔지만, 어쩌면 몸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쉬어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 2026. 9. 26.
침상마다 하나의 인생이 누워있다 입원을 해 보니 알겠다.병실의 침대마다 사람 하나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이 살아온 한 생애가 함께 누워 있다는 것을.쉰넷의 모 씨는 간경화 말기라고 한다.아직 쉰넷이면 한창이라 할 나이인데병원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일흔넷의 금 모 씨는 교통사고로 고관절을 다쳐꼼짝하지 못한 채 누워 있다.그런데 오늘은 간암 말기였던 남편의 발인 날이다.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그 마지막 길조차 따라나서지 못하고병실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은 어떠할까.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쉽게 건넬 위로의 말조차 찾기 어려웠다.그리고 나도 그들 곁의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 한동안 이사며 집안일이며해결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붙들고 살았다.이제 좀 정리가 되어 간다 싶었는데이.. 2026. 9. 20.
긴 이사를 마치며, 이제 나를 돌볼 시간 한동안 블로그를 쉬었다. 글을 쓸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사를 준비하고 집을 비우고, 또 새로운 집에 짐을 들이고 정리하는 동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니 이번 이사는 단순히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버렸다. 책장을 정리하고, 가구를 정리하고, 차마 버리지 못해 들고 다니던 것들도 이번에는 마음을 먹고 내려놓았다. 집 하나를 비우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건만 비운 것이 아니었다. 내 삶에 오래 남아 있던 일들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부산의 집을 매도하고 잔금을 치렀다. 주소를 옮기고,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챙기고, 새로 살 집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갖추었다. .. 2026. 9. 17.
영화 **(( 오딧세이))**를 보고 나서 수천 년 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신이 등장하고 괴물이 나타나며, 바다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분명 현실과는 거리가 먼 신화인데 영화를 보는 내내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구나. 사람은 욕심을 부리고, 가진 것을 지키려고 싸우고, 때로는 자만하여 일을 그르친다.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며,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긴 세월을 견디기도 한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인간은 하늘을 날고 손바닥만 한 전화기로 세상 반대편 사람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면.. 2026.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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