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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이혼 일기 3

by moneysan-1 2026. 10. 23.

시어머니라는 분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만의 만남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결혼해 보니 한 남자의 가족사와 그 집안의 오랜 사연까지 함께 떠안는 일이었다.

나의 시어머니는 남편을 낳은 생모가 아니었다.

남편과는 불과 열네 살 차이.

남편의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이미 자라 있는 아들의 어머니가 된 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분 역시 처녀로 얼마나 어려운 자리에 들어오셨을까.

남편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고 했다. 

계모에게 혹여 미움을 받을까 염려한 할머니는 손자를 감싸고 또 감싸며 키우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자란 남편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나 최고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어머니라고 해서 그런 아들을 마음대로 훈육할 수 있었겠는가.

열네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데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니었으니, 꾸짖는 일조차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할머니의 보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도 어려웠으리라.

시할머니는 27살 청상과부였다.

일자무식이었지만 아주 애바르고 온몸으로 세상과 마주해 살아온 사람이라

 고집과 욕심은 말도 못할 정도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처녀로 재취자리에 시집 온 새 며느리에 아주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시어머니도 몰락한 친정으로 인해 20살 어린 나이에 재취로 올케로부터 억지로 보내져 시집온 불쌍한 분이셨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시어머니는 내게는 비교적 따뜻한 분이었다.

전남편이 결혼을 반대하는 우리 집으로 인해 단식을 하며 있을 때,

시어머니가 재직 중인 학교로 전화를 해 오셔서 저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만나

결혼이 되었기에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며느리인 나를 잘 대해 주셨다.

어쩌면 당신도 그 집안에서 살아오며 겪었던 어려움이 있었기에 

젊은 며느리의 처지를 이해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시어머니의 따뜻함과는 별개로 내 결혼생활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은 시아버지가 관리했고,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고작 5만 원이었다.

살림을 꾸려야 하는 사람은 나였지만 살림을 꾸릴 만한 돈은 내 손에 없었다.

교사였던 나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도

남편에게 받는 생활비는 친구들이 받는 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벌어들인 돈마저 생활비에 보태야 했고, 그렇게 해도 늘 빠듯했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결혼생활의 몫인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을 만큼 참고 살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젊은 나에게는 결혼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그분 역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세월을 보내셨을 것이다.

한 집안에 들어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또 시어머니가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참고 삼키며 살아오셨을까.

세월이 흘러 내가 황혼의 이혼을 하고 나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여자라는 이유로 참고 살아야 했던 세월은 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군가의 불행한 성장 과정이나 어려웠던 가정환경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될 수 있어도, 

그 상처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차이를 깨닫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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