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묵은 창문을 닦았다.
앞 베란다 창문과 뒷창문, 사위의 서재 창문에 뿌옇게 흐려져 있던 부엌 창문까지 떼어내
세제로 말끔하게 닦았다.
구축 아파트라 아무리 닦아도 새것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내 힘이 닿는 만큼 닦고 또 닦았다.
할 일을 해낸 탓일까.
몸은 분명 움직였는데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뿌옇던 유리가 맑아진 만큼 마음 한구석도 환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뤄두었던 어반스케치 숙제를 꺼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어반스케치.
이사하느라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고, 물감이며 파스텔이며 그림 재료들은
모두 하동집에 가져다 놓은 뒤였다.
그래도 그리고 싶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나니 색을 입힐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손녀의 크레파스와 사인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것이면 어떠랴.
손녀의 크레파스를 빌려 색을 칠하고 사인펜으로 선을 더했다.
오랜만에 잡아본 그림이라 예전 같지 않았다. 손의 감도 떨어져 있었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종이 위에 나타나는 모습도 달랐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지우고 싶었지만 그냥 계속했다.
잘 그리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배우려고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 새롭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잘해야 할 이유도 없고, 남보다 앞서야 할 까닭도 없다.
어제보다 선 하나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긋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색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손녀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라니.
생각하니 그것도 재미있다.
언젠가는 내 물감과 파스텔이 기다리고 있는 하동집에서 천천히 그림을 그리는 날도 오겠지.
그때는 창밖의 산도 그리고, 마당도 그리고, 화개에서 만나는 소소한 풍경들도 한 장씩 담아보고 싶다.
오늘 그린 그림은 마음먹은 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오랜만에 다시 선을 그었다는 것,
다시 색을 칠했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 더 반갑다.
삶도 그림과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다.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가 훨씬 많지만,
그렇다고 종이를 덮어버릴 필요는 없다.
조금 삐뚤면 삐뚤어진 대로,
색이 번지면 번진 대로,
다시 한 줄을 그어보면 된다.
나는 오늘,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