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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사를 마치며, 이제 나를 돌볼 시간

by moneysan-1 2026. 9. 17.


한동안 블로그를 쉬었다.

글을 쓸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사를 준비하고 집을 비우고, 또 새로운 집에 짐을 들이고 정리하는 동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니 이번 이사는 단순히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버렸다.
책장을 정리하고, 가구를 정리하고, 차마 버리지 못해 들고 다니던 것들도

 이번에는 마음을 먹고 내려놓았다.

집 하나를 비우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건만 비운 것이 아니었다.

내 삶에 오래 남아 있던 일들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부산의 집을 매도하고 잔금을 치렀다.
주소를 옮기고,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챙기고, 새로 살 집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갖추었다.

6년 전 아무 조건 없이 큰돈을 빌려주었던 친구에게 빚도 모두 갚았다.

채무완불 영수증을 받아 가방에 넣고 친구와 밥을 먹은 뒤 해운대 바닷가를 걸었던 날,
 마음 한쪽에서 무거운 돌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간 것처럼 홀가분했다.

세월이 가면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내가 직접 끝을 내야 비로소 끝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하동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이혼으로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관계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말로 해결해 보려고 여러 번 기다렸다.
기회를 주고 또 주었다.

마지막까지 강제집행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고 서로 체면을 지키며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만에 내 메시지를 읽은 것을 확인하고도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정한 절차에 맡기는 것뿐이었다.

집행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선납금을 예치하면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된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용했다.

오랫동안 망설이던 일을 마침내 내 손에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 놓이자 이번에는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며칠 전부터 유난히 숨이 찼다.
어지럽기도 했고 장딴지에는 자꾸 경련이 났다.

이사하느라 무리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헤모글로빈 수치가 8이라고 했다.
정상보다 많이 낮은 심한 빈혈이었다.

의사는 주사 치료까지 이야기했고, 나는 우선 한 달 동안 약을 복용해 보기로 했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자궁을 적출하기 전, 일 년 가까이 하혈을 하면서 빈혈이 심해져

 석 달 동안 약을 먹고 몸을 만든 뒤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는 피가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몸에서 무엇이 빠져나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사하고, 정리하고, 서류를 챙기고, 기다리고, 마음을 졸이고….

돌아보면 참 긴 이사였다.

집에서 집으로 옮겨온 것만이 아니라
내 인생의 한 시절에서 다른 시절로 옮겨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강제집행에 필요한 선납금을 예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 뒤의 일은 정해진 절차에 맡기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이제는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집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이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다.

며칠 전 찍힌 사진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승의 인연이 잘 정리 되기를 바라며...



돌계단 끝에 오래된 탑이 서 있고, 나는 주황색 가방을 뒤로 든 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다.

사진 속 계단은 반듯하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오랜 세월 닳고 패인 돌계단이다.

문득 내가 살아온 시간도 저 계단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가파르고,
때로는 발을 헛디딜까 조심해야 했고,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고르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숨이 차면 잠시 쉬어가고,
몸이 아프면 몸부터 돌보고,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될 일은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가려고 한다.

꼭 정상까지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오늘 한 계단이면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랫동안 나는 다른 사람과 가족과 집과 돈을 지키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남은 시간만큼은
나 자신에게도 그만큼의 정성을 들이며 살아보고 싶다.

긴 이사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다시 계단을 오른다.

이번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길도,
누군가를 위해 가는 길도 아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다.

이제,
나를 돌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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